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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임진왜란 이전에 개인 화기를 가지고 있었다”

기사승인 2017.05.22  13: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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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순력도 다시보기] <27> 조선의 우수한 무기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 있을 걸 알고서도 당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부터 준비태세를 갖춘 조선이다. 성을 새로 쌓고, 일본 침략이 예상된다며 명나라에도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럼에도 조선은 초반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조선이 임진왜란 초기에 맥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전편에 소개를 했다. 이유는 싸울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이 침략해올 걸 알면서 성을 쌓았음에도 소용이 없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발생 50년전에 군역이라는 의미 자체가 사라진 나라였다. 군인다운 군인이 없는 그런 나라였다. 그러기에 전쟁을 치르면서 단련된 일본과 싸우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일본이 임진왜란 때 쓴 조총이다. 조선군은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에 맥없이 무너졌다고 기록은 돼 있지만 조총이 임진왜란 초기에 승전을 올린 일등공신이었다고 말하기는 부족하다. 뭐니뭐니해도 일등공신은 나약한 조선의 군사력이었지, 조총을 일등공신으로 보기엔 부족하다.

 

아울러 조선이 일본의 무기 수준을 너무 낮잡아본 것도 문제였다. 고려 때부터 화약을 들여와 각종 무기를 만들어내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새로운 무기는 더 많아졌다. 조선초 태종과 세종 대는 화약무기의 전성시대로 볼 수 있다.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은 화약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술을 지녔고, 화약무기 개발을 주도한 인물이다. 최무선은 고려 때, 최해산은 대를 이어 조선의 녹을 먹으며 무기의 핵심인력이 됐다. 그야말로 부자가 왕조를 달리하면서 무기를 개발해 온 셈이다.

 

조선 세종 때는 무기가 더 발달한다. 북방 영토를 개척하면서 휴대용 개인화기들이 등장한다. 바로 ‘총통’으로 불리는 무기이다. 총통은 개인화기였다. 대부분은 총통의 손잡이 부분에 나무자루를 끼우고 이를 어깨 사이에 넣어 고정시킨 뒤 화약선에 불을 붙여 사용했다. 지금의 소총과 비교하면 개머리판이 나무자루에 해당하고, 개머리판을 제외한 나머지 소총 부분은 총통이라고 보면 된다. 총통 가운데 ‘세총통’이라는 것도 있다. ‘세총통’은 다른 총통에 비해 작고 가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크기가 14㎝도 채 되지 않는다. 가지고 다니기에 무척 편리했으나 문제는 쏘고 난 뒤 뜨거워진 총통을 만질 수 있느냐였다. 그래서 세총통을 잡아주는 ‘철흠자’라는 사격보조기구를 제작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세총통은 지금의 권총과도 같다. 세통총은 아주 작아서 병사 한 명이 한꺼번에 30개를 장전해서 지니고 있다가 적군과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총통은 초기엔 화살을 날려서 적을 쓰러뜨렸다. ‘사전총통’과 ‘팔전총통’은 개인화기로 적게는 4개에서 많게는 8개의 화살을 적을 향해 날려 보냈다. 한꺼번에 수 개의 화살을 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규격화돼 있어야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조선초 무기 규격화는 매우 앞선 형태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좀 더 위력적인 개인화기가 만들어진다. 종전 무기가 화살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면, 이번엔 지금의 총알에 해당하는 철환을 쏘는 개인화기의 등장이다. 대표적인 게 승자총통이다.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가 1575년(선조 8)에서 1578년(선조 11) 사이에 만들었다는 승자총통은 한꺼번에 철환 15개를 발사할 수 있었고, 사거리는 600보였다고 한다. 300m에서 400m까지 날려 보냈다는 말이다.

 

철환을 먼 거리까지 날려 보내려면 화약이 우선 필요했다. 화약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원료는 염초였다. 염초는 한꺼번에 많이 얻기가 어려웠고, 아껴서 써야했다. 염초는 구워서 화약으로 만드는데 그 과정을 공개하는 것도 꺼려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왜구에게 기술이 흘려갈까 걱정하는 기사들이 눈에 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염초 관련 기사. 염초를 만드는 기술이 왜인들에게 넘어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강원도에서 바치는 염초는 영동지역 바닷가의 각 각 고을에서 구워 만듭니다. 따라서 사람마다 그 기술을 배워 전해왔습니다. 그러나 간사한 백성이나 주인을 배반한 종들이 울릉도나 대마도 등지로 도망을 가서 화약을 만드는 기술을 왜인에게 가르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제부터는 연안의 수령들로 하여금 화약을 구워 만들지 못하게 하십시오.”<세종실록 34권, 세종 8년(1426) 12월 13일 임신 3번째 기사>

 

염초를 구워서 화약을 만드는 기술이 왜구들에게 알려질까 전전긍긍하기도 했으나, 실제 염초는 많지 않았다. 염초를 구워내는 것 또한 지역별로 할당이 주어졌는데, 그걸 채우지 못하면 형벌이 내려지기도 했다.

 

“염초를 구워 내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올해 봄철 각 도에서 구워낸 염초는 분량이 다 맞습니다. 홀로 충청도 남포 도회소만 구워 낸 액수가 모자랍니다. 청컨대 해당 관리와 장인들의 죄를 다스려 주십시오.”<문종실록 8권, 문종 1년(1451) 7월 3일 기해 3번째 기사>

 

무기를 관장하던 군기감에서 올린 상소는 그대로 시행된다. 관리와 장인에게 태형이 내려졌다. 관리는 곤장 30대를, 장인은 곤장 40대를 맞는 태형을 받았다고 실록은 전한다.

 

이처럼 조선은 뛰어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음 편에는 조총과 조선 무기를 비교하며 설명하겠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형훈 기자 coffa@naver.com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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