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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에 미친다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인데 그러질 못해요”
“사냥에 미친다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인데 그러질 못해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7.03.0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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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24> 사냥을 그린 ‘교래대렵’
탐라순력도 '교래대렵' 그림 부분. ©미디어제주

왜 인간은 고기를 밝힐까. 극도의 채식주의자가 아닌 이상 고기를 먹지 않고 버텨낼 사람은 없다. 인간에게 건전한 영양공급은 식물로도 가능하지만 고기가 없다면 생명연장을 위한 꿈을 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단백질을 부르고, 지방을 부른다. 몸이 단백질과 지방을 기억했다가 그게 부족해지면 단백질이 당기고, 지방이 당긴다. 그걸 채우기 위해 필요한 건 고기이다.

 

인간은 고기를 얻기 위해 사냥이라는 걸 개발해낸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은 사냥을 통해 단백질과 지방을 공급해왔다. 사냥은 농사보다 오랜 인간의 생존방식이었다. 인간은 사냥을 하기 위해 도구도 개발해왔다. 사냥은 먹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었으나, 사냥이라는 걸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려고 도구의 발명이 이뤄졌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사냥은 인간 문명을 발달시킨 한 축이었다. 시간이 흘러서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는 시기에도 사냥은 이어졌다. 유명한 무용총 벽화를 보라. 우린 사냥하는 무용총 수렵도를 바라보며 ‘고구려의 기상’이라고 기억한다.

 

<탐라순력도>에도 사냥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번 기획은 왜 그토록 사냥이 중요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예전 사냥을 단순한 놀이로 봐서는 안된다. 선사시대 때는 먹기 위한 생존이었고, 시대가 흐르면 신에게 바칠 제물도 얻고, 먹을 것도 함께 얻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면서 사냥에 ‘법도’를 가져다붙이곤 했다. 활을 쏘는 것도 그랬다. 활쏘기 동작을 보면 그 사람의 덕을 살필 수 있다고 해서 활쏘는 정자를 ‘관덕정’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조선시대엔 사냥을 그다지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 임금은 사냥을 하고 싶어서 안달인데, 신하들은 그러지 말라고 왕을 다그친다. 왜냐하면 사냥도 자칫하면 미칠 수 있기에 그렇다. 탐닉을 넘어 탐욕 단계에 이르면 안된다는 말이었다. 무언가에 미치도록 빠지는 걸 한자어로 하면 ‘황(荒)’이라고 붙인다. <시경>의 ‘당풍’편에 ‘실송장’이라는 시가가 들어 있다. 거기에 ‘호락무황(好樂無荒)’이라는 글이 보인다. “즐기는 건 좋지만 거기에 빠지지는 말라”는 뜻이다. 여자에 빠지면 ‘색황(色荒)’이 되고, 사냥에 미치면 ‘금황(禽荒)’이 된다. 그걸 경계를 해왔다. <태조실록>을 보자.

 

유관이 태조 이성계와 경연을 하는 자리에서 미치[荒]게 된다는 걸 경계하라고 하자, 태조는 사냥도 하지 못하냐고 묻는다. 그에 대해 유관은 다음처럼 얘기를 이어간다.

 

“봄에 사냥하고, 여름에 사냥하고, 가을에 사냥하고, 겨울에 사냥하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지만 이는 종묘에 쓸 제물을 위한 것이지, 사냥을 좋아한 것은 아닙니다.”<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1398년) 12월 17일 기미>

 

유관은 이성계더러 사냥은 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종묘를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사냥을 하기 위해 마구 돌아다니는 일을 경계하라고 던진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면 사냥과 관련된 글이 무척 많다. 관련 기사만 4300건을 넘는다. 사냥은 임금 혼자 나서는 게 아니라, 군단을 이끌고 가야 하고, 피해를 보는 이들은 농민이기에 사냥을 자제하라고 했던 게다.

 

이성계는 활을 워낙 잘 다루기에 사냥하는 일을 즐겼을 것 같은데, 유관의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성계 아들인 태종 이방원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서 사냥을 하려고 다 익지 않은 벼를 모두 추수하라고 요구한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을 도왔던 이숙번이 그러지 말라고 했음에도, 태종은 이숙번에게 “다시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태종 이방원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돼서도 사냥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세종이 즉위한 그 해(1419년)에 이방원의 잦은 사냥을 비판한 장월하는 100대를 맞는 장형에 처해지고, 장월하의 부인과 아들은 제주의 관노비 신세가 되기도 했다.

 

사냥은 임금만을 위한 놀이는 아니었다. 제주에 온 관리들도 사냥을 즐겼다. 제주도는 전라도 관할이어서 전라도관찰사가 제주목사인 수령을 다스려야 하지만, 제주목사는 특별하게도 관찰사의 권한 일부를 위임받았다. 그만큼 권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목사들은 제주에 와서 사냥을 즐겼고, 고통은 제주사람들이 안아야 했다. 조선 조정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될 정도였다.

 

“진상하는 물건을 모두 민간에 강요하니 폐단이 적지 않다. 이제부터는 사슴과 노루 가죽을 50장에서 40장을 줄여서 10장만 올리도록 하라. 또한 세 고을 수령이 사냥을 나서는데 하룻밤을 지내더라도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거처하므로 폐단이 많다. 임금이 행차할 때도 장막만 설치하는데, 신하로서 이같이 할 수 있겠느냐.”<성종실록 15권, 성종 3년(1472년) 2월 23일 경인>

 

조선 조정에서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억동에게 내린 글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슴과 노루 가죽이 진상품이었고, 제주목사를 비롯해 정의현과 대정현 등 3명의 수령들이 사냥에 나서면 기거를 할 집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종은 그로부터 한달도 되지 않아 제주판관으로 내려가는 신계린을 불러 사슴과 노루 가죽 등의 진상 품목을 10장으로 줄인 사실을 일깨운다. 그러면서 “사냥을 좋아하지 말라”고 한다.

탐라순력도 '교래대렵'의 글 부분. 1702년 음력 10월 11일 어떤 목적으로 짐승을 잡았고, 얼마나 잡았는지 표기돼 있다. ©미디어제주

 

<탐라순력도>에 등장하는 ‘교래대렵’은 제주시 교래리 일대에서 펼쳐진 사냥의 모습을 표현했다. 1702년(숙종 28) 음력 10월 11일에 사냥을 나선 것으로 기록돼 있다. 사냥을 한 이유는 조정에 진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사냥엔 이형상 제주목사를 비롯해 대정현·정의현 수령들이 다 참석했다. 엄청난 군사력이 동원됐다. 말을 탄 마군이 200명, 걸어서 짐승몰이를 하는 군사 400명, 포수 120명이 동원됐다. 마군들은 말 위에서 활을 쏘며 짐승을 겨냥하고 있고, 말에서 떨어진 이들도 그림에 보인다.

 

그날 하루. 동원된 인력은 720명이다. 사냥 목적으로만 투입된 인력이 이 정도이니, 뒷수발을 하는 인력까지 포함하면 더 되지 않았을까.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획득한 사냥감은 사슴 177마리, 멧돼지 11마리, 노루 101마리, 꿩 22마리이다. 모두 합치면 311마리가 되는데, 사냥 목적으로만 투입된 병사 두 세 명이 짐승 한 마리는 잡았다는 말이 된다. 조정에 진상하는 동물 가죽의 몇 배를 이날 하루에 다 잡았다는 말인데 하루에 가능했을까. 이 정도의 동물을 죽이려면 한 곳에 완전 몰아넣어서 도륙했다는 말 밖에는 안된다. 아니면 활솜씨와 총을 쏘는 솜씨가 너무 탁월했던지. 어쨌거나 311마리의 짐승을 끌고 가려면 엄청난 고생을 했을 게 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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