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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징용 숫자 파악 힘들어…‘사람’으로 분류되지 않았기에
조선인 징용 숫자 파악 힘들어…‘사람’으로 분류되지 않았기에
  • 고하나 특파원
  • 승인 2014.12.12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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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고하나의 일본 이야기] 마츠시로 대본영을 가다<5>

그때 광차(鑛車)의 뒷모습은 어땠을까.
도로 위의 자동차에도 뒷모습이 있다 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라 하는 이도 있다.

뒷모습이 너무 선명히 남아 있어 슬픈, 마츠시로의 공사현장으로 들어가보자.

 

지하고를 뚫는 공사는, 처음에는 1일 3교대로 시작했다고 한다. 후에 1일2 교대 (12시간) 로 진행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밤이고 낮이고, 일은 하루종일 쉴새없이 계속됐다. 당시는 공기를 압축시키는 기계나 착암기라는 암석을 깎는 기계 정도로 공사가 진행됐기 때문에 오직 사람의 힘으로 완수해야 하는 공사였다.

착암기로 직경3㎝의 구멍을 뚫고, 거기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한뒤 폭파시킨다. 그 후 폭파된 암석을 다시 깨뜨린다. 그 폐석(파낸 흙이나 암석)은 광차나 삼태기를 이용해서 밖으로 운반한다.

어둡고 좁은 지하고 안에서 이 공사를 계속한다는 것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를 등에 지고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위 사진과 같이, 작업 현장은 지하고 안에 아직도 많이 남겨져 있다.

 

# 누가 이 일을 했는가

육군의 명령으로 카시마구미, 니시마츠구미라는 회사를 중심으로 일할 사람들이 모집됐다.

조선인 약6500명(7000여명이라고도 말해지지만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 일본 여기저기서 행해진 댐 공사 등의 공사현장에서 이동해 온 사람
• 강제연행(한반도에서 강제로 끌려온 사람)

일본인 약 3000명
• 노무보국대(목수,미장공, 전기공 등)
• 지역의 성인 및 중학생, 초등학생들도 동원됐다는 기록이 있다

총 300만명이 동원됐다. 하루에 1만명이 1944년 11월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대략 300일간 공사에 투입됐다.

이 공사의 주력원이었던 노동자는 조선인이었다. 정확한 인원은 파악되지 않는다.

이미 많은 자료가 소실됐으며, 인원파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분석한 한 자료에 의하면 (나와있는 표현을 그대로 적겠다)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의 사람들은 사실상 ‘사람’으로 분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인의 약 반 정도는 전시 노동 동원으로서 강제적으로 조선으로부터 연행돼 온 사람들이었다. 남은 반은,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의해 토지와 일을 빼앗겨 일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본각지의 탄광, 댐, 터널 등의 공사현장에서 일을 했으나, 대본영공사를 위해 마츠시로에 모이게 된 것이다.

증언자, 고(故) 최소암씨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고(故) 최소암씨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이천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7명 형제 중 막내였던 그는 소작과 하루벌이로 근근이 살아가던 집안 형편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평생, 읽고 쓰는 것을 할 수 없었다.

생활고로 어려운 소년시절을 보내고 16세가 되던 때 나가사키에 있었던 큰형을 의지해 일본에 도항했다. 먹는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한 도일이었다. 최소암씨는 토목공사현장을 전전하면서 터널공사의 발파기술을 익혔다.

그런 그에게 남은 반생을 결정지을 일이 벌어졌다.

1944년 가을, 나가노현 마츠시로의 지하고 공사에 관한 얘기였다.

당초 갈 마음은 없었지만, 스승의 설득도 있었기에 마츠시로행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지하고 공사는 다이너마이트의 파열, 낙반(갱내의 천장이나 벽의 암석, 토사가 무너져 내림) 등이 계속되는 난공사였다.

부족한 식량탓에 늘 배가 고팠다.
심한 감시와 노동 속에서 몸 편히 뉘일 수 있는 공간조차 없었다.

<노무자 합숙소 및 생활>

일본인 감독관의 증언은 조선인들과 사뭇 다른 것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봄이 오자 꽃을 광차에 꽂아 봄을 느끼기도 하며 즐거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서, 그것은 그런게 아니라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장례였을 것”이라 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견해가 옳은 시각이라 말할 자격은 내게 없다.

증언과 자료들을 보며 추측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팍팍한 삶, 그 안에 (작은 희망과도 같은) “꽃”이 절실히 필요했다는 사실. 그저 그것만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마츠시로의 기억. 그 뒤안길은 ‘진실’과 ‘소문’, ‘피해’와 ‘가해’가 ‘탐사’인지 ‘관광’인지 모를 모순된 뒤엉킴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남겨진 기억의 단편들’을 멋대로 쓸어담을 수 있는 권리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저마다 ‘생각의 여백’이 채워지고 있을 뿐.

당신은, 당신은, 이곳의 뒷모습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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